Fandom : Troy
Paring : Pre-slash
클라삥's notes : 왕이 될 운명과 영웅이 될 운명.
[트로이] 정해진 길 (아키오디)
사자의 두 눈이 조용히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는 검은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빛났다. 그는 지금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라도 하듯 몸 안쪽으로 굳게 팔짱을 꼈다. 그러자 단단하게 자리잡은 그의 근육이 더욱 긴장했다. 애초에 그는 이런 곳따윈 오고 싶지 않았다. 주위를 감싸고 있는 축제의 분위기도 싫었다. 지금 이렇게 들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기나 할까? 아니, 틀린건 그들이었다. 그들은 정작 가장 중요한게 무언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더욱 심해졌다. 사자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신전 안에는 벽의 양쪽으로 나라를 대표하는 대신들이 서있었다. 주로 백발의 노인들이 주를 이룬 그들은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자치하고 있었다. 잠시 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사라졌다. 동시에 신전 안에는 엄숙한 공기가 흘렀고 사자는 때가 왔음을 알았다. 시간에 맞추어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하자 곧이어 신전 안으로 한명의 남자와 그 뒤를 잇는 시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아하게 움직이는 그 걸음걸이는 이 남자가 대단히 높은 위치의 사람이라는걸 알게 해주었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양옆의 대신들이 경애를 표하듯 자세를 낮추었다. 그때까지 한쪽 기둥에 기대어 있던 사자는 이제 자신의 앞으로 지나갈 그 남자를 더욱 눈을 빛내며 바라보았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째서 그만이 이토록 오만한 모습인가 궁금해 할 정도였다. 사자는 점점 속안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참기가 힘들어졌다.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가서 저 남자를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사자는 오늘만은 그를 실망시킬 수가 없었다. 이타카의 새로운 왕, 오디세우스의 즉위식을 망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 *
'꼭 참석해 주길 바라네, 아킬레스.'
언제나와 같이 그는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과연 그의 부탁을 거절할 이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킬레스는 어쩜 그 중 한명일수도 있었다.
'내가 왜?'
'아킬레스...설마 그날 출전 예정이 있는거야?'
오디세우스는 그럼 정말 큰일이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왔다. 하지만 아킬레스는 그런 오디세우스에게 등을 돌리고 검만 매만지고 있었다.
'단지 갈 이유가 없을뿐이야.'
목소리 또한 건성이었다.
'또 뭔가 맘에 않드는게 있는거군,'
약간 웃음이 베어있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아킬레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잘생긴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오디세우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자네가 정말 내키지 않는다면 오지 않아도 좋아. 대신에...난 좀 섭섭하겠지만 말이지.'
가지런한 손가락이 부드러운 갈색의 턱수염을 스쳐갔다. 그건 오디세우스의 말할때 버릇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주로 그 자신이 아킬레스에게 뭔가 원하는게 있을때면 자연스레 나오는 행동이기도 했다.
'왕이 되는게 그렇게 좋아?'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게 아니야, 아킬레스. 내 운명같은 거랄까?'
'난 운명따위는 믿지 않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이건 내가 왕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진 일이었어. 신의 아들인 네가 영웅이 될 운명을 타고 난 것처럼 말야.'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스가 신의 신성함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마다 싫어한다는걸 알고 있으면서도 서슴없이 이야기 했다. 그는 때로는 아킬레스를 자극하는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이렇게 말을 돌리고 있을때는 말이다.
'오디세우스...넌 이타카의 왕이 된다는게 어떤 뜻인지 알고 있겠지? 그렇게 현명하다는 너니까 말이야.'
왕이되면 지금까지의 입장과는 분명 틀려질 것이다. 나라를 대표하여 정치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나라와의 교섭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타카는 어떠한가? 국내정세는 이미 오래전부터 안정된 상태였다. 하지만 밖으로는...여러개의 소국가들이 모여있는 그리스령에서 이타카의 입장은...
'아마도 즉위식이 끝나는 대로 미케네에 가봐야 겠지.'
아킬레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오디세우스는 알고 있었다.
'그자의 말을 들을건가? 그자가 하라는대로 하고 거기에 개처럼 따를거야?'
'개라니 말이 좀 심하잖아, 아킬레스,'
'뭐가 달라!? 왕이 되면...당신은 더이상 날 찾아오지 않겠지? 그렇지?'
아킬레스의 커다란 손이 오디세우스의 턱끝에 닿았다. 그리고 한손으로는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굽슬거리는 갈색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답지않은 애절한 눈빛에 오디세우스는 조금 당황했지만 곧바로 등을 돌려버리는 아킬레스 덕분에 그 순간도 잠시뿐이었다.
'지금처럼은 무리겠지만...시간이 날때면 만날수 있어, 아킬레스. 그리고 자네도 언제든지 이타카에 날 만나러 와도 좋아. 자네가 문을 통과할때면 누구도 막지 않을걸세.'
오디세우스의 말은 아킬레스에게 별다른 위안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만의 것이었다. 하지만 왕이 되면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것만이 아니게 된다. 무엇보다도 가장 세력이 강하다는 미케네의 왕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것이 아킬레스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왕이 아니라면...그런 일 따위 하지 않아도 될 것을.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왕이 되어 그리고 그 즉위식에 자신더러 와달라고 하고 있다. 어차피 말로는 설득은 커녕 상대도 되지 않는다. 그럼 힘으로라도 그를 즉위식까지 붙잡아 둘까? 그래도 결국 오디세우스가 왕이 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 그의 말대로 이건 운명이었다.
'즉위식은 언제야?'
* * *
언제나 평민들이 입는 간단한 옷만을 입던 그였다.
그 래서 신하들에게 항상 주의를 듣는다는걸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그는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화려한 왕의 의상을 입고서 자신의 앞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아킬레스의 얼굴이 굳어져갔다. 그는 기둥에서 몸을 떼고 일어났다. 새로운 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 그는 신전을 빠져나왔다. 눈부시게 내리쬐는 태양아래에서 아킬레스의 금색 머리카락이 빛나고 있었다.
END



